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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고향은 한국.. 우리기관의 선교사들-1

Everlenz 2010. 1. 15. 17:15

 

모례리 선교사(Dr. Florence Jessie Murray : 1894.2.16.~1975.4.14)

 

모례리 박사는1894년 2월 16일 노바 스코티아의 픽토우 랜딩(Pictou Lan-ding, Nova Scotia)에서 태어나 목사 가정에서 성장했으며, 그곳에서 초등교육을 받았다.
그녀는 목사가되길 원했으나, 당시 장로교에서는 여성에 대한 목사 안수가 허용되지 않았다.
그 대신 의학 공부의 길을 선택했는데, 하지만 당시 는 여자 의사들이 이제 막 자신의 길을 계발하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머레이 박사가 핼리팩스(Halifax)에 있는 달하우시(Dalhousie) 의과대학에 입학 당시 유일한

여성 지원자였다.
그녀가 성령의 세례를 경험한 것은 1917년 핼리팩스 폭발사고가 상상을 초월하는 비상사태를 만들어

냈을 때였다.
그때 그녀는 4학년에 재학 중인 의학도였으며, 실제적인 임상경험이 부족했지만 응급구호에 뛰어들어야만

했다.
그녀는 뛰어난 활약을 하였고, 곧 이어 YMCA 응급병원 마취과장으로 임명되었다.
핼리팩스 비상사태에 이어 곧바로 뒤따라 온 것은 1918년의 전 세계를 강타한 소위'스페인 독감'이라는

전염병이었다.
머레이박사는 비록 의과대학 학부생에 불과했지만, 또 다시 선발되어, 의사까지도 병들어버린 노바 스코티아의 록폿(Lockport N.S)지방에
파견되었다.
그녀는 또 한번 자신의 능력을 드러냈으며, 그 마을을 도와 위기에서 벗어나게 했다.
1919년 졸업 후에 머레이 박사는 보스톤 하버(Boston Harbour)에 있는 롱 아일랜드(Long Island)병원에서 외상 인턴과정을 밟은 후, 핼리팩스로 돌아와 개업을 하였다.
그녀가 한국에서 의료선교사로 봉사하길 희망하면서 그 분야의 개척자인 케이트 맥밀란(Kate MacMillan)을 도와 일하기로 결단했던 것은
이 시기였다.
1921년 의료선교사로 임명된 후 한국의 함흥지역 등 북한에서 의료선교활동을 하였고 1942년 일제의 선교사 추방에 의해 강제 출국하여 캐나다로
되돌아 갔다.
그녀는 신체적 강인함과 도덕적인 강건함, 흔들리지 않는 신앙 그리고 그녀의 예리한 유머 감각으로 젊은 시절의 많은 위기와 시험을견디어 내고
많은 일을 하였다.
한국어와의씨름, 한국에서 살기위한 문화적 요구, 그리고 당시에 지속되던 일본의 관료체제와의투쟁은 약한 정신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을것이다.
태평양전쟁이 터지자 머레이 박사는 적국인으로 간주되고 결국 일본인 전쟁포로와 교환이 되었다.
핼리팩스에 돌아와서, 선교부(캐나다 연합교회)로부터 휴직을 하고 개업을 하였다.
그러나 1947년 한국에서 의료 선교 일을 다시 시작하는 기회가 주어지자,기쁜 마음으로 환영했으며,

첫사랑으로 되돌아갔다.
1947년, 53세의 나이로 미국 병원선으로 태평양을 횡단하여 인천항에 입국하여, 그리워하던 한국 땅에 돌아와 처음 세브란스 병원 부원장으로
일하였다.
해방 후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미군정청의 요청으로 서울대학병원에서도 일을 하고, 김활란 박사의 요청으로

이화대학에서도 잠깐 일을 하였다.
6.25전쟁으로 부산으로 피난하던 중에는 피난민들과 빈민, 고아들을 보살폈다.
1959년 원주연합기독병원 설립자 공동대표로, 경천원(나환자 자활촌)을 설립하여 그들에게 자립갱생의

길을 열어주었으며,
결핵환자들을 위하여 모바일클리닉을 운영하였다.
이때 의무기록시스템을 정비시켰으며, 제1회 의무기록사대회가 원주기독병원에서 개최되기도 하였다.
1961년 정년으로 귀국하였다가 1962년 재입국하여 구라선교에 헌신하였으며 1969년캐나다로 돌아가 생활하던 중
1975년 4월14일 81세로 핼리팩스에서 별세하였다.
감사와 찬양 예배가 제이 위슬리 스미스연합교회에서 캐나다의 연합교회의 핼리팩스 노회에 의해 집전

되었다.
핼리팩스 지역으로부터 많은 한국인들이 참석하였다.
그는 한국동란 동안, 덴마크 적십자 병원선 유틀란디아 선상에서의 봉사로 구스타프 아돌프 왕으로부터 메달을 수여받았고,한국 대통령으로부터 민간공로훈장을 수여받았다.
1956년 그의 모교인 달하우시 대학으로부터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또한 그가 재직하는 동안의 빛나는 봉사를 기념하여, 핼리팩스의 파인힐 신학교에서,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그렇게 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리턴투코리아에 기록한 캐나다에서 의료선교를 허락받고 출발하라는 통지를 받은 오후부터 며칠간의 이야기를 쓴 내용을 발췌하였다.


그날 오후 나는 핼리패스로 가서 짐을 꾸렸다.
월요일에 세관 통관검사를 마치고, 화요일에 짐을 기차로 발송했으며, 수요일에는 선교부의 신형 차를 타고

떠났다.
이틀후 퀘백 마고그에서 아다를, 온타리오 해밀튼에서 엘다를 픽업했다.
미국으로 들어가는 국경에서 이민국 직원이 어디로 가는지를 물었다.
우리가 "한국이요"라고 말했을때 그는 눈을 크게 뜨며 바라보면서 말했다 
"한국에 간다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이에요. 내가 왜 당신들을 말리겠어요?"
모든 주유소에서도 비슷한 말을 들었으며, 다음과같이 대답해주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오래살았기에 고향이나 다름 없어요.
다시 돌아갈 수 있게 되어 매우 기뻐요."
한국어 연습을 위해 매일 한시간씩 한국어로 이야기했다.
16일이 걸려 결국 우리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는데, 그곳은 핼리팩스로부터 6,500여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이었다.
거기에서 우리가 알게 된 것은 미군을 통하지 않고서는한국으로 갈 수 없다는 사실이었으며,
미군은 몇몇 미국기관을 통해서만 수속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한국행 대기자명단에 우리 이름을 올리기 위해 우리의 담당 위원회는 우리의 소속을 잠정적으로 뉴욕

위원회로 변경시켰다.
미군 통제 하에서의 여행은 일본군 통제 하에서처럼 아주 까다로웠으며, 우리들은 누가 누구로부터 배웠는지를

생각하며 놀라워했다.


주요 약력
1894년 캐나다 노바 스코시아주 픽토우 랜딩에서 목사의 딸로 출생
1919년 (25세) 달 하우시 의과대학 졸업
1921년 한국에 의료선교사로 입국
1922년 북간도 용정 제창병원원장
1923년 함흥제헤병원원장
1942년 (48세) 일제에의해 강제출국
1947년 (53세) 한국에 재입국
1953년 세브란스병원부원장
1959년 원주연합기독병원 설립자 대표
1959년 경천원(나환자자활촌)설립
1961년 정년으로 귀국
1962년 재입국하여 구라선교
1969년 캐나다로 돌아감.
1975년 (81세) 고향인 노바 스코시아에서별세